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강영선교수의 평신도신학강좌14>
 
천안문화신문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서를 잘못 해석하는데서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생긴다는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는지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서는 올바른 해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서해석을 잘못해서 여러 가지 이단종파가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꾼들이 자신의 못된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성서를 악용하기도 합니다. 마치 제대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는 돌팔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답시고 더 병들게 하듯이, 성서해석을 잘 못하면 사람의 심령을 오히려 병들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서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성서해석의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1)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 저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지, 그 작품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그 작품을 바르게 감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서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선입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서 배워온 교리(dogma)라는 안경을 쓰고 성서를 대합니다. 소위 ‘주일학교 신학’(Sunday School Theology)을 통해 고정된 자기 나름의 하나님, 예수, 성서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성서를 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대답과 결론을 통해서 성서를 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나름의 전이해(前理解)를 갖고 출발할 때, 우리는 성서를 도그마(敎理)의 시녀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성서를 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적 현실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러한 추구를 할 때 흔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해답을 성서에서 끄집어내려 하지요. 비윤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은 모두 제거하고,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교훈만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적인 해답들이란 사실은 성서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요.
셋째로, 성서와 삶의 현실 사이에 나를 개입시켜 성서를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내가 기준이지요. 하나님, 구원, 진리 등에 내 나름대로의 관(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 주는지 알고자 하는 자세로 성서를 연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 나름의 전이해는 관심을 이끌어 주는 유인자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가르치는 실제 자체가 이러한 전이해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 양자 사이에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고, 따라서 성서의 메시지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 나름의 선입관을 갖기 마련이고,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고치기 어려운 고질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대할 때는 가능한 한 이러한 선입관으로 착색된 안경을 벗어버리고, 맑고 투명한 안목으로 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성서의 문학양식을 파악해야 합니다.

성서는 한 권으로 되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66편의 글이 하나로 편집되어 한 권의 책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글마다 문학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신문을 예로 들어봅시다. 신문은 크게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문화면 등으로 구분됩니다. 1면의 헤드라인에는 언제나 그날의 토픽 뉴스가 실립니다. 그리고 2면이나 3면에 실리는 사설이나 논설은 그 토픽 뉴스를 보다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해설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만화나 만평은 풍자에 속합니다. 그것 역시 그 날의 토픽 뉴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면에는 교육, 종교, 문학, 예술, 스포츠 등의 기사가 실립니다. 시와 소설도 나오고, 일기예보와 TV프로도 나옵니다. 그리고 맨 뒤에 나오는 사회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이 보도됩니다.
이처럼 신문 한 장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문학양식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신문의 각 면을 그 양식(樣式)에 따라 이해하며 읽어야 합니다.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에 실리는 각종 사건 기사는 사실에 입각하여, 육하원칙으로 기록되므로, 그런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논설이나 사설은 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논리적 해석과 의미부여를 찾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면 말짱 헛일이지요. 만화와 만평은 풍자로서 읽어야 합니다. 풍자를 읽으면서 육하원칙에 의한 사실적 보도를 기대한다면 넌센스지요. 그러나 그 풍자 역시 재미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그 속에 담긴 주제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 한 장을 읽는데도 이처럼 각 면에 따라 독자의 기대와 읽는 자세가 달라야 하듯이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는 역사, 설화, 율법, 예언, 시, 격언, 잠언, 지혜문학, 논설, 편지, 이야기, 풍자 등...다양한 양식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양식들을 이해하며 읽으면 오해를 피할 수 있고, 성서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고백적 해석사(Geschichte)에 해당되고, 그 안에는 설화로 포장된 메시지도 많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등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사, 이집트 탈출의 역사, 율법(민법, 형법, 종교법 등)과 생활규범 등이 혼재해 있습니다.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역사와 사사(士師)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룻기는 룻이라는 한 여인의 삶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등은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역사가 주로 왕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예언자들의 활동과 메시지가 첨가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은 당시대의 지혜문학에 해당되며, 각각 소설, 시, 잠언, 격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 까지는 예언자들의 활동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예언서에 속하는데, 그중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묵시문학이란 이 세상의 종말과 종말적 사건을 다루는 문학양식으로서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기록한 책인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지만, 부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문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 동아, 조선, 중앙 등 주요 일간지들이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데 있어서 기자의 시각에 따라, 또는 신문의 성격에 따라, 그 보도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호의적인 신문과 냉소적인 신문이 있고,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신문과 비판적인 신문이 있습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뿐만 아니라,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사건보도를 할지라도, 그 장소와 시간과 숫자에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요. 따라서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를 꿰뚫고 있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유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배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비교적 민중적 색채가 강하고, 요한복음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네 복음서의 차이점들은 복음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로서 사도들의 활동과 메시지, 그리고 바울사도의 일생과 전도여행,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면서 교회들이 설립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문의 논설에 해당됩니다. 박해받던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신학전문가가 기록한 책으로서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서신들은 바울사도나 그 외의 몇몇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글들로서, 주로 당시의 신앙공동체였던 교회들이나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그래서 ‘서신’(書信)이라 부르지요. 그 서신들에는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요한계시록은 흔히 ‘묵시문학’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인해 박해받던 시절, 요한사도가 밧모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당시에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과 박해자 로마의 미래운명, 그리고 이 세계의 미래와 종말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쉽게 해석할 수 없도록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특히 상징(symbol)을 사실(fact)로 해석하거나, 비유나 은유를 문자주의적으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 잘못 해석할 때 여러 가지 오해와 이단 학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가 취하고 있는 문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성서해석의 지름길입니다.

3)성서의 콘텍스트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서의 본문(text)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이 처한 당시의 상황과 맥락(context)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신학전문 용어로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도 하지요.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정황을 ‘삶의 자리’라 하는데, 그 삶의 자리를 떠나서는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삶의 정황 속에서 살고 있던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언어로 당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서의 컨텍스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곧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뜻합니다.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의 여신도들을 향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이 말씀을 앞 뒤 맥락 다 빼고, 또 바울사도 당시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도 배제한 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의 성직임명을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던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의 오류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문화적 특수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파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중에 후처를 두 명씩이나 둡니다(창16장, 25장). 게다가 야곱은 처가 도합 네 명이었지요(창29-30장). 지금도 중동지역의 베드윈족들은 일부다처주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중동의 히브리 문화에서 남성은 생명을 주는 주체요, 여성은 생명을 받는 씨받이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씨를 받아 후손을 계승시켜주는 도구적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성과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여자’로서나 ‘인간’으로서 모든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삶의 정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성서에 담긴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 됩니다. 성서에 기록된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몇 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문자주의적으로 직수입한다면, 많은 오해와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은 성서를 무가치한 책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이단종파를 양산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성서의 컨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할 때만이 성서 텍스트는 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항상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기사입력: 2007/02/28 [10:54]  최종편집: ⓒ ccnweekly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