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적 사고란 무엇인가?<강영선교수의 성서강의 17>
 
천안문화신문
<강영선교수의 성서강의 17>

17. 히브리적 사고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을 때 히브리적 사고를 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히브리적 사고란 어떤 것입니까?


구약성서는 히브리 문화권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헬라문화권에서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문화는 오늘날 서구문화의 모태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서구문화의 영향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문화는 우리에게 친근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는 우리에게, 특히 서구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문화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 문화를 (특히 히브리적 언어문화를) 이해하고 히브리적 안목으로 구약성서를 읽으면 비교적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적 사고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로, 히브리적 언어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본질적 포장 속에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구의 언어문화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point)을 드러내는 문화지요. 그래서 핵심이 분명치 않은 이야기, 대화, 설교, 논설 등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언어문화에서는 본질적 메시지를 겉포장 속에 감추어 전달하는 경향성이 강합니다. 사실상 포장은 내용물을 드러내기까지 필요한 보조 장치에 불과하지요. 포장은 비본질이고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포장 속에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 최초의 인류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 뱀의 유혹 이야기,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그릇(포장)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 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캐내는 작업이지 포장 자체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성서는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구유가 예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는 뜻도 되지만, 구유 자체를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그릇 속에 담겨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이지 그릇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문화를 유산으로 받은 오늘 우리들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겉포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나요?”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뱀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등등. ‘어떻게’라는 질문은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 보다는 방법론을 묻는 과학적 질문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향하여 그러한 과학적 질문을 하면 결코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why) 또는 ‘무엇’(what)이라는 질문에는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뱀을 유혹자로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처럼 ‘왜’ 또는 ‘무엇’은 목적과 의도를 묻는 질문이며, 그 그릇 속에 담긴 물건의 실체와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성서를 향해서는 언제나 방법이 아닌 목적을 묻는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설화(說話), 이야기, 동화, 시, 역사, 소설, 논설, 우화, 편지, 상징, 비유, 풍자 등 여러 가지 그릇(포장)에 담겨서 전달되기 때문에, 그 포장을 뜯어내고 내용물(메시지)을 찾고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하나의 동화에 불과하지만, 어린이들은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즐겨 읽고,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중요한 교훈(메시지)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토끼와 거북이가 대화를 할 수 있었는가?’ 라든지, ‘그들이 경주했던 산의 높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라는 과학적 질문은 우스꽝스러운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표현합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양치는 목자는 양떼의 생사와 안위에 절대적인 존재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시23)고 고백합니다. 떠돌아다니며 양떼를 치는 유목민들이 적과의 전투시에 필요한 피난처, 산성, 반석, 바위, 방패, 요새 등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기도 합니다.(시27, 28, 31, 등 참고) 그러나 헬라 문화권에 오면 하나님이 추상화되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거룩하시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식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바뀝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관찰하는 반면, 헬라적 사고에서는 하나님을 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인들은 말이 곧 그의 인격이며 실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은 서푼어치 값어치도 없어서, 계약서를 쓰고, 인감도장을 찍고, 그것도 모자라 보증인을 세우고, 담보를 제공하지요.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모든 계약을 말 한 마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말 한 마디로 충분했지요. 특히, 신의 말씀은 절대화된 역동적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의 음성은 자연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힘으로 묘사됩니다. 바벨론이나 앗시리아에서 신(Marduk-Ellil)의 말이 ‘자연적 힘’(의인화된 자연의 힘)이라면, 구약에서는 의식적(意識的)이고 윤리적인 인격성 자체입니다. 따라서 천지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매개체가 아니라, 창조주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곧 야훼 자신인 것입니다.
‘말씀’의 히브리어는 ‘다바르’(dabar)이고, 그 다바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로고스’(λογος)가 됩니다.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서 발전된 로고스는 헬라화된 로고스로서, 고도의 ‘정신적 에너지’이며 ‘정신적 기능’인데 비해,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히브리화된 로고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곧 하나님이다”(요한1:1). 헬라적 ‘로고스’가 정돈되고 중용적이며, 계획되고 의미로 차있는 이성적인 것이라면, 히브리적 ‘다바르’는 역동적, 명령적, 전진적, 활동적인 것입니다. 즉, 로고스가 행동화될 때 다바르가 됩니다. 구약성서에서 보면 축복, 저주, 유산상속, 계약 등이 말로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말이 곧 말하는 사람(話者)의 인격, 의지, 계시,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의지와 행위는 다바르의 양면입니다.
넷째로,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얼굴이나 외모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날 미스 코리아니 미스 월드니 하면서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후에 헬라문화권의 소산이지 히브리 문화는 아닙니다. 그들은 먼저 사람의 성품을 살피지요. 요셉(창39:6), 사울(삼상9:2), 다윗(삼상16:12), 압살롬(삼하14:25) 등에 대해서는 인물이 준수하고 아름답다고 보도되지만, 그러한 표현은 곧 그들의 내면적 인격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즉, 요셉의 미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적으로 작용하고, 사울의 미는 왕으로서의 그의 품성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아가서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세 부분(코 7:4, 목 4:4, 7:4, 유방 8:10)을 묘사할 때도 적군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망대’나 ‘성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접근할 수 없음, 정복할 수 없음, 순결함, 결백함, 처녀성과 같은 여인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외모를 찬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이 히브리적 미학의 특징은 아름다움의 정신화에 있습니다. 즉, 선과 미는 같은 개념입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미는 신적인 것이지요. 히브리인들은 자연 자체의 미에는 의미부여를 하지 않지만, 그 자연이 창조주를 찬미하는데 의미를 둡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해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장막을 쳐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 (시편 19:1,4-5).

기사입력: 2007/04/26 [09:31]  최종편집: ⓒ ccnwee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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